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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수 동상 내리고 민영은 땅 되찾고

기사승인 2015.08.13  09: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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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심판으로 철거, 청주시가 보관하던 동상 ‘행방묘연’
땅 찾기 소송, 청주시 승리…미 대상 토지도 환수 길 열어

충북의 친일 역사 바로세우기의 시작은 정춘수 동상 철거에서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친일파 공덕비 철거, 친일재산 환수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진행됐다.

범시민 서명작업과 공청회, 청원서 제출을 통해 정춘수 동상 철거를 요구해온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시민들은 1996년 2월 8일 드디어 뜻을 이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출신 6명의 동상을 모신 3·1공원에서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된 것이다.

▲ 1996년 철거 당시 정춘수 동상

시민들의 요구는 정춘수의 친일 행적에서 비롯됐다. 정춘수는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지만 독립선언을 한 장소(태화관)에 나타나지 않았고, 수사가 진행되자 자수한 뒤 전향성명서를 작성하고 풀려났다. 이후 조선감리교 감독으로 선출됐고, 전형적인 친일 활동을 이어갔다. 민족대표 33인이라지만 다른 대표들의 동상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다.

이후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횃불로 대체됐다.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남은 좌대를 철거하기로 한 청주시가 그 자리에 공과비를 세우는 것을 검토했다. 과도 있지만 공도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결국 그 자리는 좌대까지 철거하고 횃불조각이 세워지는 것으로 결론났다. 2010년 3월 1일 그렇게 15년간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역사로 사라졌다.

 

사료가치도 없고 후손도 관심 없어

이렇게 철거된 정춘수의 동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철거된 정춘수의 동상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철거 직후 청주시는 후손들에게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했고, 청주박물관에도 보관을 의뢰했지만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시청 창고에 보관돼 온 동상은 2003년경 사직동 안기부(국정원) 창고로 다시 옮겨졌다.

당시 본보 보도에 의하면 동상을 관리해야할 청주시가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어 안기부 창고에 맡긴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최근 청주시 해당부서에 문의했지만 동상의 존재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청주시 관계자는 "10년전 담당자까지 확인했지만 어디에서 보관되는 지 확인할 수 없었다. 유실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되는 과정과 이유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며 목이 부러진 동상을 전시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할 전망이다.

▲ 민영은 땅 국가 귀속 판결 후 시민운동을 기념해 설치한 동판.

정춘수 동상과 함께 시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친일 관련 사건은 민영은 후손의 땅 찾기 소송이다. 2011년 3월 민영은의 후손들은 서문대교와 성안길 등 총 1894.8㎡인 12필지의 도로를 철거하고 토지를 인도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인 2012년 11월 청주지법은 민영은 후손의 손을 들어줬지만 청주시가 곧바로 항소했고, 시민참여로 이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를 중심으로 10여개의 시민·종교단체가 연대해 청주시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정치권도 참여했다. 서명운동 등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결국 2013년 항소심에서 결과는 뒤집혔고, 정춘수 동상에 이은 또하나의 민중의 승리로 기록됐다. 지난해 3월 1일에는 이같은 내용을 동판으로 제작해 해당 도로에 설치했다.

민영은 후손과의 소송 결과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후 절차를 통해 국고 환수 대상이 아닌 친일파 소유 토지에 대해서도 환수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2013년 청주시가 항소심에서 승리한 후 법무부는 문제의 땅을 국가로 귀속하기 위해 지난해 2월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10월 31일 승소했다.

이 밖에도 음성 이무영 문학제가 중단됐고, 반야월 기념관 계획도 백지화 됐다. 법주사 경내에 있던 방인혁의 공덕비도 철거됐다. 시민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더디지만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 반성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과거 인정하고 친일청산 앞장서는 이윤‧권호정

친일청산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는 그 후손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중심에 있고, 선대의 친일행위를 애국심의 발현 정도로 착각하는 인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충북 출신 친일파의 후손인 이윤(71) 씨와 권호정(63) 씨의 행동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이윤 씨의 아버지는 옥천 출신의 이준식(1895~1961)이다. 917년 판임관견습시험에 합격해 충북도 도서기에 임명되었다가 영동군, 보은군, 충주군 등을 돌며 근무했다. 1934년 훈8등 서보장을, 1935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음성군수로 승진해 1940년 9월까지 재직했다. 재직 당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군수품 공출, 여론 환기와 국방사상 보급, 등 전시 업무에 적극 힘썼고, 그 공으로 지나사변공적조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수록예정자 명단을 공개했고, 논란이 조·중·동을 필두로 선정기준 등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홍익대 부설고 교사로 재직하던 이윤 씨는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한통의 공개 편지를 이메일로 발송했다. 편지의 내용은 내 아버지가 수록예정자 명단에 소개된 이준식이고, 사전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기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조‧중‧동을 필두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친일인사 명단 발표 며칠 후에 아픈 마음으로 자신을 고백한다”며 “일가 중에는 그때가 좋았다며 해방이 오지 않았어야 한다는 분도 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것이 이만큼이나 어려운 일일까”라고 자문하기도 했다.

민영은의 외손자 권호정 씨는 이미 알려진 인물이다. 원심을 깨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권 씨는 소송이 부당하다며 1인 시위를 하는 등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법원에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김포에 살고 있는 그는 취재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측근에 따르면 목적한 것을 이룬 만큼 언론에 또 소개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한창 1인 시위를 할 당시 권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피해 입은 많은 분들이 같이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다. 반성하며 더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옥균 기자 oog99@cbinews.co.kr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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