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영 친일행적 드러나 문학제 중단… 생가 터도 폐허로 방치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5)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꽃동네 얘기를 하면서 자린고비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흔히 구두쇠를 일컫는 ‘자린고비’란 말, 당신도 들어보았을 줄 압니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이 회자됩니다만, 대체로 ‘해도 너무한다’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부터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자린고비가 속출하여 가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음성 금왕의 조륵이라는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표적인 자린고비로 손꼽힌 것으로 전해집니다.

▲ 음성읍 석인리 입구, 이무영이 태어난 마을임을 알리는 표석.

금왕 조륵 ‘자린고비’ 원조설

조륵은 영조 때 사람인데 너무나 인색하고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행한 이력이라고 전하는 이야기들은 보통 사람들은 손을 내저을 만큼 기상천외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가령,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니 그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 하여 장 도둑놈 잡으라고 외치며 단양까지 좇아간 일은 유명한 얘기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사오면 그 부채가 닳을까 염려되어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머리만 흔들었다죠. 또 제삿날이 돌아와 굴비를 사오면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서 밥을 먹는데, 식구들이 한 숟가락에 두 번 쳐다볼라치면 짜다고 호통을 쳤다니…….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이 희화된 일화들은, 그가 큰 부자가 된 배경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므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보탤 수도 있을 겁니다.

조륵이 환갑이 되던 해 경상·전라 지역에 큰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곡식을 풀어 구휼했으며, 죽을 고비를 넘긴 백성들이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송덕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니, 여기서 ‘考’자는 ‘나를 낳아준 어버이’란 뜻인즉, 굶어 죽게 된 사람을 인정으로써 살게 하였으니 부모와 다름없다는 말이라고, 금왕읍 삼봉리 증산마을 앞 유래비에는 적혀 있습니다. 그럴 듯도 하고 터무니없는 말인 듯도 싶습니다. 관청에서 그의 비를 세워 그의 삶을 기리는 한편 ‘자린고비賞’을 제정하여 시상하는 걸 보면,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여 이웃과 나누는 삶을 거룩하게 여기며 십분 공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신조 아래 소비로써 경제를 지탱하는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덕목인가 물으며 실소할 뿐입니다.

“사람이란 흙내를 맡아야 하느니라. 대처 사람들이 암만 고향 진미로 음식을 만든대도 시골 음식처럼 구수한 맛이 없느니라.…….”(이무영 소설 <제1과 제일장> 중) 음성 읍내 설성공원, 이무영(1908~1960)의 글을 새긴 문학비가 서 있던 자리에 가보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서 출생한 이무영의 본명은 용구(龍九)입니다.

5세까지 오리골에서 살다가 6살 때 중원군 신니면 용원리 26번지로 이사하여 13세까지 소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20년 상경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어 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도일하여 고학으로 세이조[成城] 중학교에 다니던 중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집에 기숙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에게 4년 간 문학수업을 받았습니다.

귀국하기 전 1926년 18세의 나이로 장편 《의지 없는 청춘》을 출간했고, 이듬해 《폐허의 울음》을 펴내며 작가로서 돛을 올렸습니다. 귀국 후 1932년 장편 《반역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며 소설가로서 주목을 받았고, 희곡 <모는 자와 쫓기는 자>, <톨스토이> 등을 발표하여 극작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1933년부터는 이효석 등과 9인회 동인으로 활동했고, 1936년엔 죽마고우이자 시인인 이흡과 함께 《조선문학》을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 이무영 생가 터. 음성군이 부지를 매입해 관리해 왔으며, 작품비와 흉상, 무영정 등이 건립돼 있다.

 

▲ 1990년 음성 읍내 설성공원에 건립된 이무영 문학비. 작가의 친일 논란으로 무영제가 중단된 이후 생가 터로 옮겼다.

공원 문학비는 수풀속에 묻혀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파시즘이 더욱 공고해지자 소설 장르도 더 이상 현실을 정면으로 문제 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조선 문학계가 진퇴양난에 빠지자 이무영은 이른바 ‘농민소설’이라는 분야를 개척했습니다. 1939년 직장으로 다니던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경기도 군포의 궁말로 가서 농민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때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삶에는 친일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죠. 민족과 조국보다 ‘흙’을 우선시하고 집착하는 태도는 일제의 식량증산 정책에 복무할 소지를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942년 부산일보에 일본어로 발표한 <청기와집>으로 제4회 조선예술상 문학상을 받았고, 만주지역의 일본군 부대를 다녀온 감상을 토로한 《개척촌을 보고》 등을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림자도 없다’는 필명(無影)이 무색할 만큼 그의 삶에는 친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셈입니다. 《친일문학론》의 저자인 임종국도 생전에 이무영을 두고 ‘반드시 징치해야 할 일급 친일문인’으로 꼽았다 하거니와,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게재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작년인가, 그가 살았던 군포의 능안공원에 건립됐던 이무영 작품비를 군포시가 돌연 철거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설성공원의 문학비가 사라진 것도, ‘무영로’라고 명명했던 거리 이름을 ‘설성공원로’라고 고친 일도 그의 친일행적이 드러난 것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요. 평곡사거리에 설치했던, 이무영이 태어난 석인리 방향을 알려주던 표지판도 반기문 총장의 생가를 알리는 내용으로 바뀌었더군요.

이무영의 생가 터는 잡풀이 우거진 채로 방치돼 있습니다. 음성군이, 1994년부터 개최해 온 무영제 예산 지원을 2011년 중단함에 따라 문학제와 함께 생가 터 관리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설성공원에 있던 문학비는 마당 한 구석으로 옮겨져 수풀 속에 묻혀 있습니다. 해마다 돈을 타내 마당이 비좁을 만큼 정자를 세우고 흉상을 세우고 작품비를 세우고……, 세우고 세우던 사람들은 정녕 이무영의 행적을 모르고 그런 사업을 벌인 걸까요? 어쨌거나 이무영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으니 생가 터는 물론 마당 가득한 기념물들의 운명도 마침내는 편치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친일작가잖아요!”― 왜 문학비를 옮겼느냐는 물음에 음성군 직원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묻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죠. 아, 당신은 아십니까? 이렇게 간단한 친일 청산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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