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가난한 농업국가 → 세계적 공업국가 → 복지국가가 된 배경 있어

윤송현의 세계도서관기행
(8)북유럽 편

스웨덴 남부의 말뫼는 스웨덴과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지금은 올레순대교로 코펜하겐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기차로 쉽게 오갈 수 있다. 말뫼에는 세계적인 조선소가 있었는데, 1980년대 한국과 일본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

말뫼조선소에 세워져 있던 골리앗 크레인이 지금은 울산 현대조선소로 옮겨졌다. 말뫼에서 골리앗 크레인이 철거되던 날, 많은 말뫼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산업구조 조정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전해진다. 골리앗크레인이 있던 자리에는 토로소라는 세계적인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그 토로소를 보기 위해 말뫼에 간 적이 있었다. 말뫼 역에서 내려 길을 찾다가 광장 앞에 세워진 특별한 조형물을 발견하였다.
 

말뫼역 앞에 있는 조형물 <꼬부러진 권총>.

‘총구 꼬인 권총’이 시사하는 것

스웨덴의 산업현장을 찾다가 광장에서 총구가 꼬인 권총 조형물을 발견했다. 이 조형물은 스웨덴이 어떻게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세계적인 공업국가, 복지국가가 되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유럽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스웨덴 사민당은 즉각 중립의 의지를 천명하고, 모든 정당을 포괄하는 비상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스웨덴은 전쟁에 끼어들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한손 총리를 비롯한 사민당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미 스웨덴은 1814년부터는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중립과 평화의 전통을 견지해오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립을 지키는 일을 선언으로만 되지는 않았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접 형제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스웨덴과 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가 있었지만, 스웨덴은 응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여론이 들끓었지만 사민당 지도자들은 정서적인 입장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다.

어차피 같이 대응을 해도 독일의 전쟁욕구를 억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결국 스웨덴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쉽게 독일에 점령되었다. 덴마크는 일찍 항전을 포기하고 전화를 피했지만, 노르웨이는 끝까지 저항하였다. 스웨덴 국내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독일을 비난하고, 노르웨이 지원을 주장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난민들을 돌봐주고, 민간 지원에 머물렀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핀란드를 압박하고 헬싱키를 공격했다. 스웨덴의 주위 국가들이 온통 전쟁터가 된 것이다. 여론은 핀란드에 대한 동정과 지원 요구가 거셌다. 그렇지만 스웨덴 정부는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정서적인 정의감보다는 현실적인 노선을 택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스웨덴의 북부 산악지대를 통해 지원군을 핀란드에 보내겠다는 요구를 해오기도 했다. 스웨덴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지원군을 보낸다고 핀란드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고 보았고, 중립국가의 입장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여론은 또 들끓었지만 전쟁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정서적 정의감보다는 현실 선택

이번에는 독일이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을 세운 독일은 군대를 안전하게 육로로 이동시키기 위해 스웨덴에 길을 요구했다. 비무장의 상태로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여 독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방국을 초토화시킨 군대를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은 스웨덴 국민들에게는 치욕적인 요구였다. 한손은 인내를 선택했다. 노르웨이 난민들을 대거 수용하는 것으로 공분을 삭였다.

독일의 요구는 더 심해졌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군병력을 소련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스웨덴에 국내통과를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완전무장한 병력이었다. 통과를 허락한다면 중립국가라는 이미지도 흔들린다. 국제적인 신뢰도 무너진다. 스웨덴의 고민은 컸다. 그렇다고 거절하면 당장 전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2차대전에서 스웨덴을 지킨 한손총리.

결국 한손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스웨덴 내에서 조용할 리가 없었다. 스웨덴의 정의감이 들끓었다. 언론에서도 연일 격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비판은 사민당 내부에서도 이어졌다. 이런 선택은 스웨덴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이었지만, 결국 스웨덴 지도자들은 전쟁의 포화로부터 스웨덴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스웨덴의 평화는 그저 유지된 것이 아니라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이웃나라들이 모두 포연에 휩싸인 가운데에서 지켜진 것이다. 굴욕적이라고 생각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래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더 중시한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에는 제대로 된 산업시설, 기반시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스웨덴만이 온전히 산업시설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이 전후복구를 시작할 때 스웨덴은 모든 산업시설을 풀가동했다. 나라를 온전히 전화로부터 지켜낸 결실이었다. 명분은 빠지고, 자존심은 상했지만, 산업시설을 풀가동하여 유럽의 실업자들을 불러들이고, 유럽의 재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전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복지국가 스웨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51년에는 스웨덴 복지제도의 뿌리가 되는 연대임금제도가 제창되었다. 노조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노동문제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도 폭발적인 경제성장이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까지 스웨덴은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인력이 부족해서 동유럽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고, 여성들의 일손을 빌리기 위해 여성의 사회 참여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했다. 한손의 뒤를 이은 에를란데르 총리나 팔메총리가 스웨덴의 복지제도를 완성했다고 이야기되지만 그 토대는 한손 시대에 이뤄진 것이다. 그러니 평화만한 복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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