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동 발산공원, 무궁화 기단 위…사직동 충혼탑 호국영령과 나란히일제 식민지체제 구축위해 만든 관변단체 ‘농촌진흥회’가 神壇碑 설립

청주시 사직동 충혼탑 입구에 세워진 천지신단비
청주시 가경동 발산공원에 설치된 천지신단비

 

청주시 가경동 발산공원에 세워진 천진신단비와 발산마을 유래비

앙가주망 시인으로 거침없는 풍자와 해학·역설의 시 세계를 펼쳤던 청주시 문의 출신의 신동문 시비가 있는 청주시 가경동 발산공원.

“서울도/해 솟는 곳/동쪽에서부터/이어서 서 남 북/거리거리 길마다/손아귀에/돌 벽돌알 부릅쥔 채/떼 지어 나온 젊은 대열/아! 신화같이/나타난 다비데群들”로 시작하는 신동문의 시 <아! 신화 같은 다비데 군들>은 4·19 혁명을 노래한 시 가운데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이 뿐이랴! “내 노동으로/오늘을 살자고/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머슴살이하듯이/바친 청춘은/다 무엇인가.”(시 <내 노동으로> 부분)

시인 류정환은 신동문의 시에 대해 “자본에 이끌려 하는 노동을 ‘머슴살이’로 규정하고 ‘내 노동으로 살자고 결심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갈망했다”고 했다.

유흥가가 밀집돼 있는 고속터미널 뒷골목 뒤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발산공원의 신동문 시비는 박정희 정권시절 긴급조치 9호로 연행된 뒤 절필하고 단양으로 내려간 그의 삶과 묘하게 일치한다.

신동문의 시비를 지나 공원 정상부에 오르면 또 하나의 비가 등장한다. 이른바 ‘천지신단비’(天地神壇碑)다. 천지신단? 모든 것을 다 알려준다는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없는 단어. 한자로 굳이 해석해 없는 말로 풀어보면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단 비석’ 정도가 되려나!

천진신단비 옆에 있는 ‘발산마을 유례비’(유래비가 맞는 표현이다 : 편집자주)는 이렇게 설명한다. “충효를 바탕으로 80여년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천지신단은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마을 비입니다. 1996년 들어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주민의 뜻을 모아 후손에게 옛고을 발산마을의 유래를 전하고져 이곳 공원에 마을 유례비를 세웁니다 1997.5”

비문만 보면 ‘유례’와 ‘유래’가 혼동될 정도로 깊이는 낮다. 하디만 천지신단비와 유래비의 기단부분에는 모두 대한민국 국화인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호국영령 충혼탑과 충북대학교 박물관 밑에도

 

천지신단비는 이곳 가경동 발산공원 외에도 청주시에 두곳에 더 존재한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사직동 충혼탑. 전몰군경 및 호국용사의 위혼을 기리기 위해 1955년 10월 건립됐다.

충혼탑 맞은편에는 “이곳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신 호국영령을 모신 곳이오니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란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따로 있다.

충혼탑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 옆에도 또 하나의 비석이 충혼탑과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다.

이 비의 이름도 ‘천지신단비’.

이 비에 대해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전 대표는 이 비를 ‘짝퉁 천지신단비’라고 했다. 강 전 대표는 “이것은 일종의 짝퉁이다. 일제가 1935년에 조성했던 천지신단이 없어진 그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70년대의 일이라고 하는데, 누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다시 세웠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이전 설치된 천지신단비
충북대학교 야외박물관 천지신단비 안내판

 

청주시내에 현존하는 또 하나의 천지신단비는 충북대학교 야외 박물관에 있다. 2012년 까지만 하더라도 “고대의 제정일치시대(祭政一致時代)에는 나라마다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천군(天君)이 있으며, 그 제를 올리는 제단이 생기게 되었다. 보통 단(壇)에는 ‘천지신단(天地神壇)’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붉은 칠을 하였다”라며 조선시대 것으로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됐었다.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지만 청주시 용정동 이정골에도 ‘천지신단비’가 있었다. 2012년 <디지털청주문화대전>은 용정동에 있었던 신당이라 정의하면서 “청주시 용정동 이정골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천제당에서 먼저 제사를 올린 후 산제당으로 내려와 산신제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마을 앞에 있는 선돌에 장승제를 지낸다”고 정의했다.

 

천지신단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고유의 전통이라고?

 

충북대학교 야외박물관 천지신단비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안내판의 설명은 바뀌었다. 바뀐 안내판에는 “이 비는 원래 사직동 충혼탑 입구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가 미신 타파를 명분으로 설립을 강제하였는데, 사실을 경외의 대상인 자연신을 내세워 조선 농민의 정신을 통일하고 장학하기 위한 식민지 농촌 사상 통제 정책의 산물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는 이 비의 설치 장소와 크기, 조경방식과 춘추제전방식까지 제시하였는데 1930년대 농촌진흥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총력적인 농촌통제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천지신단비가 조선시대 것이라는 설명에서 한 순간 1930년대 일제의 잔재라고 설명을 바꾼 것이다.

 

1934년 11월 12일자 매일신보 (자료: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일제치하, 미신타파와 천지신단비

 

국립중앙도서관 자료검색에서 ‘천지신단’이란 단어를 검색했을 때 처음으로 네글자로 검색이 되는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12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영동군회동에서 천지신단을 봉건 /다른 미신을 타파하고저 추성감사제 거행>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는 “영동군 영동면 회동리 진흥회에서는 소화 7년 10월경에 동리 후록(뒷산기슭)에 천지신단을 봉건하고 (받들어 짓고) 동리민이 천지신명에 감사한 생각을 가지어 정신적 통일과 타숭신(다른 신을 숭상함)의 미신은 철폐되어 매우 좋은 성적을 얻었으며 1년에 춘추 양기로 분하야(봄가을 둘로 나누어) 춘에 단제를 지내고 추에는 추성감사제를 거행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소화’는 일본왕의 연호인 ‘쇼와’(昭和)의 한자식 발음으로 1932년에 해당한다.

매일신보의 기사에 따르면 1932년 10월 경 영동군 영동면 회동리에 처음으로 천지신단이 세워졌다.

설립목적은 정신적 통일과 다른 신을 숭상하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은 옛 조선의 풍습임을 어렴풋이 알수 있다.

천지신단을 설립한 단체는 ‘회동리 진흥회’다. 여기서 진흥회는 일제가 관변단체로 세운 ‘농촌 진흥회’다.

 

1935년 8월 30일 발행된 매일신보 기사 (자료: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청주시 가덕면에 세워진 천지신단비

 

천지신단비에 대한 두 번째 보도가 나온 것은 1935년 8월 30일. 이날 매일신보는 <가덕면양리에 천지신단건설>(加德面兩里에 天地神壇建設)이란 제호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는 “청주군 가덕면 금거리와 병암리 진흥부에서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관념을 도모하기 위하야 천지신단을 건설하고 지난 8월 27일에 진좌제(鎭坐祭)를 행하얏다”라고 돼있다.

여기서 ‘경신숭조’라는 단어는 일본의 신사신앙과 연관된다. 2010년 8월 진행된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종교계의 대응이란’ 이란 주제로 문화학술원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모모야마가쿠인대 아오노 마사아키 교수는 “‘심전개발운동’에는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신사신앙과 ‘종교부흥’을 통한 조선인의 신앙심 향상이라는 ‘이중구조’의 성격이 내재해 있었다”며 “‘유사종교(類似宗敎)’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국체관념에 위험시되는 대상으로서 탄압받았다”고 주장했다.

즉 매일신보가 보도했듯이 천지신단비는 일본의 신사신앙과 미신타파와 연관돼 있음을 알수 있다.

 

1935년 11월 6일 매일신보 기사 (자료: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천지신단비=경신숭조의 신사신앙

 

매일신보는 1935년 11월 6일 <가경리 진흥회서 천지신단건립>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마찬가지로 기사에는 “청주군 사주면 가경리는 진흥회부인회원 등을 통한 전 부락민의 일치단합 근로호애의 정신의 ○래한 결정으로 동리만은 누년래에 없던 풍작을 정하였음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지(가경리) 진흥회의 발기로 천지 신단을 건립하고 다음달 20일에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는데 더욱 동일의 제막식을 일층의의 깊게 하고자 동신단에 헌곡하는 기회를 기하여 농산품평회를 개최하고 일전농작물(일반 농작물)은 물론 가축 가금 ○산품 부업산품 등을 진열하여....”라고 보도했다.

공교롭게도 청주시 가덕면, 가경리, 영동면 등 모두 천지신단비의 설립주체는 ‘(농촌)진흥회’다.

일제가 관변단체로 설립한 농촌진흥회는 일제가 식민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촌락단위로 설치한 관제단체 중 하나.

농촌진흥운동을 촌락단위에서 효율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세부적으로

일제 식민권력이 자신의 의지를 식민지 주민에게 관철시키는 경로는 군대와 경찰에 의한 물리적 지배, 조선총독부→도부읍면·町洞→주민으로 이어지는 행정적 지배, 경제단체(농회, 금융조합, 산업조합)를 통한 경제적 지배,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제단체(儒道會, 부락진흥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을 통한 사회적 지배, 학교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지배 등이다.

결론은 간단해졌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보도만 보더라도 청주권내에 분포하고 있는 천지신단비는 우리 고유의 풍습과 관련없는 일재의 잔재임이 쉽게 드러난다.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제기한 충북참여연대 강태재 전 대표는 “천지신단비는 일제의 잔재물에 불과하다”며 “천지신단비의 의미도 잘 모르고 그것을 다시 세운 우리역사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강 전대표는 “일제때 세워진 것은 그것도 역사이니 만큼 교육의 장으로 사용돼야 하고 해방이후 세워진 짝퉁 천지신단비는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호국영령의 근처에서,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 기단위에 세워진 천지신단비가 누리는 호사는 당장 사라져야할 부끄러운 유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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