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환, 일개 순사에서 시작해 영동‧충주군수, 중추원 참의까지 지내기생 매수해 대한제국 무기고열쇠 빼내 일제에 바치며 초고속 승진같은 친일파 손재하 돈으로 군수시절 건립…1971년 영동군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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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둑부가 임명한 최지환 당시 영동군수가 건립한 읍청루. 최지환은 악질친일경찰로 시작해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파다. 읍청루에는 최지환이 작성환 기문을 보전하는 등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글이 여전히 남아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산 4-4번지 용두봉 능선에 가면 읍청루(挹淸樓)란 정자가 있습니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돼 있지만 콘크리트로 지어진데다 주변 수목이 거칠게 자라 운치는 없습니다.

설 연휴가 막 시작된 지난 1일 이곳을 찾았습니다. 읍청루로 가기 위해선 설치된 등산 계단로를 따라 200m쯤 올라가야 합니다. 계단 초입에는 충혼탑이 서 있습니다. 응달이 진 관계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찾는 사람도 없는데다 눈 까지 그대로 있어 을씨년 스럽습니다. 긴 거리는 아니지만 계단 경사가 급해 읍청루에 도착하니 약간 숨이 찹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읍청루. 별로 볼것이 없습니다. 계단과 2층바닥, 기둥 등 구조물들이 콘크리트 구조로 돼 있습니다. 주변에는 모 문중 소유의 토지 경계를 구분하는 철책이 들러쳐져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렇게 막 자란 나무 때문에 시야도 넓지 않습니다.

1971년에 다시 세워졌다는 이 콘크리트 구조물이 굳이 향토유적이 돼야 할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친일갑부가 돈 내고 친일군수가 음주가무를 위해 만든 읍청루

 

읍청루를 설명하려면 최지환(1882~1983)과 손재하란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최지환의 일본식 이름은 후지야마 다카모리 : 富士山隆盛)입니다.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富士山)과 정한론을 제기했던 인본의 정치인 사이고(西鄕)다카모리(隆盛)중 다카모리만 따와 합친 이름입니다. 이름만 보더라도 얼마나 뼈속까지 친일인지 느낌이 오실겁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일제 순사로 출발해 영동군수, 충주군수, 중추원 참의까지 승승장구한 입지전적의 인물입니다. 일단 그의 친일 행적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손재하(1888~1952)는 충북 영동출신으로 당시 손꼽히는 갑부였습니다. 최지환과 마찬가지로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고 일제에 비행기 대금으로 국방헌금을 납부한 사실이 확인된 인물입니다. 충북을 대표하는 친일인사 중 한명으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영동군은 홈페이지를 통해 읍청루의 유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에 소재한 영동군 향토유적 27호 읍청루 안내판

우선 “영동군 향토유적 제 27 호”라고 소개합니다. 다음에 “구 황간현의 아문루(衙門樓)인 황악루(黃嶽樓)가 퇴락하여 1925년에 영동군수 최지환(崔志煥)이 당시의 지방유지와 협의하여 군(郡) 소재지인 영동읍 매천리로 이전, 신축하고 읍청루라 편액 하였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매천의 맑은 기운을 따서 이름한 것이라 하며, 이때 비용은 이당 손재하(二堂 孫在夏) 선생이 100원을 희사하여 이루어졌다.”고 덧붙입니다.

이 설명을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1925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영동군수 최지환이 황간현(현 황간면)에 있던 황악루를 해체하고 영동읍 매천리로 가져와 새로 지은뒤 ‘읍청루’란 이름을 지어 현판 글씨를 내려줬다.”

영동군에 따르면 친일파 최지환이 지었던 읍청루는 다시 옮겨집니다. 영동군은 “1971년 임혁재(任赫宰) 군수가 다시 매천리 용두산 중간봉으로 이전하였으며, 6·25때 없어진 현판은 1971년 효연 이철순씨가 다시 썼다”고 설명합니다.

 

친일파의 편액현판이 사라진 것을 부끄러워 하다

 

현재 읍청루에는 ‘읍청루 연혁기(沿革記’와 최지환군수기문(記文)‘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1981년에 다시 작성된 최지환 군수의 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드디어 挹淸(읍청)을 취하여 현판을 걸으니 그것은 梅川(매천)을 빙둘러 비치는 그림자가 맑게 드리웠다는 뜻이다, 매양 경축일이나 경사스러운 날, 관청에 일이 없고 관리들이 한가할 때 이에 술을 준비하게 하고 손님을 청하여 표주박으로 따른다,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흰 구름 노을에 앉아 술을 따르면 잔은 가벼이 나르는 듯 오고간다, 어떤이는 우아한 노래를 부르고 어떤이는 소리 높여 시를 읊을 때.... 중략.”

이 기문(記文)은 1925년 최지환이 읍청루를 지으면서 기록문으로 남긴 글입니다.

읍청루에 걸려있는 친일인사 최지환의 기문. 1981년 새로 쓰여졌다.

최지환은 앞에서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賓客(빈객) 접대는 또한 정치의 한 가지 일이다, 이에 황간에 있는 군루는 황간 현감이 아침저녁으로 거닐었고, 또한 빈객을 접대했던 곳이다. 황간은 영동군청과 자못 멀어서 어느 여가에 쉴 수 있겠는가?, 청하건대 새로운 곳으로 옮겨 풍류로서 이목을 높이는 것도 태수의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일제의 수탈로 동포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친일파 최지환은 읍청루의 풍류를 이야기 하고 정치를 이야기 한 것이죠.

읍청루에 걸려있는 연혁기. 읍청루의 건축과정과 이전과정등이 소상히 담겨있다.

그런데 1981년 10월 추설에 씌어진 것으로 돼 있는 ‘읍청루 연혁기’에는 친일파 최지환이 쓴 현판글씨가 없어져 매우 부끄러웠다고 기록합니다.

연혁기에는 “ 현 위치로 옮길 적에 누구의 소치인지 읍청루라는 大字懸板(대자현판)을 비롯하여 亭內(정내)에 있었던 최지환 군수 기문과 당시 명필로 이름 높았던 龍岡(용강) 김응연 先生의 시운을...板刻(판각)하여 걸었으나 그 行方(행방)을 감추어 찾을 길이 없어 拾年(십년)이라는 성상을 무명루로 내려 왔으니 어찌 住民(주민)으로서 면괴스럽지 않으리요”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면서 “ 樓亭(루정)에 현판이 없어 地方(지방)의 수치심을 禁(금)치 못하던 中 永同郡守(영동군수) 우용제氏 永同邑長(영동면장) 裵貞赫(배정혁)氏와 東園(동원) 林漢榮(임한영)氏의 快贊(쾌찬)으로 再製(재제)하여 懸板(현판)하니 그 뜻을 讚揚(찬양)하며 感謝(감사)함을 禁(금)치 못하는 바이다”고 적었습니다.

친일파가 만든 정자의 현판을 잃어버렸다고 지방주민으로서 면괴스럽고 수치침을 느꼈다고 한 것이죠.

그러면서 이들은 다행이라고 가슴을 토닥거립니다. 이들은 연혁비에서 “다행히 최지환 군수 기문은 전해져 있음으로 아래에 기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기문’이란 ‘정자를 지을 때 최지환 당시 영동군수가 읍청루를 짓게 된 배경을 기록한 글’을 지칭합니다.

친일파 최지환의 현판을 잃어버려서 수치스러웠지만 다행히도 기문은 전해져 내려와 다시 써 후세에 전한다는 것입니다.

 

기생을 매수해 출세하더니 기생권번 주식회사를 세운 최지환

 

 

1949년 3월 25일 부산신보에 최지환이 반민특위에 검거돼 반민특위 경상남도 조사위원회로 압송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보도문은 이렇습니다.

“반민특위 본도 조사부 심륜 조사관은 기보(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본도(경상남도) 내 고성, 삼천포, 진주 등 경유하여 지난 20일 일제시 악질고등형사로 현 국회부의장 김약수 씨를 취조한 도헌과 진주에서 과거 한일합방시 진영대 대장 경 중위를 기생으로서 매수하여 무기고의 열쇠를 훔쳐서 이를 일본인에게 바쳐 의분에 넘친 이 나라 민족이 봉기하려는 것을 미연에 방지케 한 후 더욱 일본의 충신이 되어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부사전융성(후지야마 다카모리 : 富士山隆盛)인 최지환을 지난 23일 하오 4시 각각 부산으로 압송하여 부산 형무소에 수감시켰다고 한다.(1949.3.25. 부산신보)

1949년 3월 25일 부산신보 보도내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최지환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주요 범죄사유가 대락 드러납니다.

우선 일제시 악질 고등형사 였다는 점. 한일합방당시 진영대 대장 경 중위를 기생으로서 매수해 무기고의 열쇠를 훔쳐셔 이를 일본인에게 바쳤다는 점. 이후 일본의 충신이 되어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는 점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해 공개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최지환은 188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납니다. 1906년 일제통감부 진구경무서 순검이 됩니다.

최지환의 ‘진영대 기생 매수 사건’은 이후에 벌어집니다. 1907년 통감부는 대한제국 군대에 대한 해산령을 발표합니다.

1907년 8월 최지환은 진주경무서 권임(權任·순사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진주에 주둔중인 대한제국군의 진위대(일명 진영대)를 해산시킵니다. 당시 진주 진위대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군부대신의 명령을 듣지 않자 관찰사는 최지환에게 군대해산의 대임을 맡깁니다.

그때 최지환이 부산신보에 보도된 대로 진영대 대장 경 중위를 기생으로 매수해 무기고의 열쇠를 빼돌리는 농간을 부려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앞장섰다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최지환은 출세의 길이 환하게 열립니다. 1917년 7월에는 조선이 경찰관이 오를수 있는 최고 직급인 경시로 오릅니다. 1919년 평안남도 경찰부에서 경시로 근무하면서 3‧1운동을 진압한 대가로 충북경찰로 보안과장으로 승진합니다. 이후에 음성군수, 영동군수, 충주군수를 거쳐 평안남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게 됩니다.

기생을 매수해 본격적인 친일관료의 물꼬를 텃던 최지환의 친일의 말로도 또 기생과 연결됩니다.

매일신보 등 일제강점기 시절 보도에 따르면 최지환은 1939년 11월 ‘진주 예기권번’이라는 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대표를 맡았습니다. 본래 진주는 기생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최지환은 기생조합을 부활시키고 권번 경영 허가를 받아 예기권번주식회사라는 기업을 운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번역 : 1932년 10월 2일 부산일보 보도내용)

일개 순사에서 몸을 일으켜 평북참여관의 영좌(영광스런 자리)에!

성공도 하고 명성도 얻은 최지환 충주군수

 

1932년 10월 2일 부산일보 보도기사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전북지사 홍승균 씨의 퇴직과 함께 평북참여관 고원훈 씨가 눈부시고 훌륭한 지사의 자리를 물러나 그 후임으로 충북충주군수 최지환 씨가 발탁되어 평북참여관으로 영진하였다(영전하였다).

참여관은 명치 39년 8월초 한국도 순사로 임명되어 경남진주경찰서에 들어갔다. 동(명치) 41년 5월에는 금줄에 닛별, 경부에 승진하였다.

민완가였던(민완형사였던) 대정 6년 7월, 게이시(경시, 또는 계시 일본 경찰계급)에 임명되어 동 9년 8월 충청북도 경찰부 위생과장으로 본도에 들어온 뒤, 보안과장으로 옮겼지만 곧 대정 10년 9월 현직인 군관리(군수인 듯)에 임명되어 음성, 영동에 6년 4개월간 재임하고 소화 3년 1월 충주군수로 오늘에 이르렀다.

재임 4년 9개월간 충주에 남긴 공적은 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학교 신축 6개소, 군청 관사 신축, 충주공립농업학교 신설, 충북선 충주 연결, 김화선 충주, 영덕선 2등도로 보수 등은 특필(특별히 써둠)할만 한 것으로 그밖에 민풍개선, 산업의 진전 등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 없는 공적을 쌓은 이른바 공도 이루고 명성도 얻어 충주를 떠나는 일이 성취되었다. (1932.10.2.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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