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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민 혈세로 보전되는 ‘일급친일’ 이무영 생가

기사승인 2019.02.08  1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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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행적 불구 죽어서도 호사…2002년 음성군비로 생가터 매입
흉상‧문학비 설치하고 음성향토전시관에 유품까지 별도 전시

일제강점기 시절 적극적인 친일문학활동을 했던 소설가 이무영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음성군은 군비를 들여 그와 관련된 유품을 보전하고 있다.

 

2010년 4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충북지부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동상 앞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합니다.

그리고 3년 뒤 음성군 음성읍 설성 공원내에 설치된 한 인물의 문학작품비와 흉상이 철거됩니다. 흉상의 주인공은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이무영(李無影/소설가, 1908~1960)입니다.

김승환 충북대교수는 2011년 <이무영의 친일 행적에 관한 고언>이란 글에서 “(이무영은) 최소한의 사죄나 반성의 표현이 없었다. 이것을 흔히 적극적인 친일이면서 반성조차 하지 않은 '일급친일'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김승환 교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012년 4월 18일 ‘이무영 기념사업폐지를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가 기념사업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이 단체는 기자회견문에서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이무영은 일급친일파로 더 이상 음성의 자랑이 아니라, 음성의 수치이기에 이무영 기념사업은 더 이상 이뤄져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일급친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일급친일’. 쉽게 나올 수 있는 표현은 아닌 듯 합니다. 이무영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다시 문학작품비가 있던 음성읍 설성공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무영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음성향토민속자료전시관 전경
음성향토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이무영의 유품
음성군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된 사진. 이무영이 해방후 삼일운동 기념 가두행진에 참여한 사진(노란색 원안)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이무영은 삼일운동과 상관 없고 오히려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인사다.

 

‘일급친일’ 죽어서도 누리는 ‘일급호사’

 

‘일급친일’로 지칭됐지만 이무영이 후세로부터 받은 존경과 환대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유공자도 누리지 못하는 ‘일급호사’ 였습니다.

1985년 음성 설성공원에 이무영 문학비가 건립됐습니다. 1994년부터 매년 4월이면 그를 추모하는 ‘무영제’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1998년부터는 무영문학상이 제정돼 무영제 때 시상하는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500만 원의 시상금이 주어졌습니다.

도로의 이름까지 그의 이름으로 바뀌어 문학비가 있는 설성공원 앞길은 '무영로'로 명명됐습니다. 생가엔 흉상과 표지, 표석, 정자 등이 설치됐고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2층 한 켠에는 이무영의 작품을 비롯해 친필·유품 등이 전시됐습니다.

음성군 음성읍 설성공원에 설치된 이무영 문학비. 현재는 철거돼 음성읍 석인리 이무영 생가터로 옮겨졌다.  사진 뒤로 보이는 정자가 일제강점기 시절 일 황태자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인풍정이다.

 

‘일 황태자 탄신기념비’와 나란히 자리잡은 문학비

 

소설가 이무영의 문학비가 건립된 설성공원에는 공교롭게도 ‘아키히토’ 일 황태자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1934년 지어진 인풍정(현재는 경호정)과 ‘황태자전하 탄신 기념비’가 있습니다.

인풍정과 황태자전하탄신기념비가 그 모습과 이름 그대로 버틴 것은 고작 11년에 불과합니다.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이무영의 문학비는 이보다 더 오래 버텼습니다. 설치 29년째인 2013년이 되어서야 설성공원에서 사라집니다.

‘무영로’란 도로명도 새주소 사업과 함께 자연스레 ‘설성공원로’로 바뀌고 음성군은 2012년부터 기념사업에 대한 사업비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마을 입구에 설치된 이무영 생가 안내 비석

 

세금 먹으며 끈질기게 보전되는 이무영의 흔적들

 

그러나 그 뿐입니다. 여전히 ‘일급친일’ 인사로 분류되는 이무영의 유적은 세금을 먹으며 굳건하게 보전됩니다.

이무영이 태어난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로 가는 길입니다. 마을입구에는 큼지막한 돌비석이 이무영의 생가를 안내합니다. 비석을 뒤로하고 한참을 들어가면 이무영의 생가가 나타납니다.

이무영의 생가부지는 원래는 개인소유였지만 2002년과 2003년 1260여㎡ 부지를 음성군이 군비를 들여 매입했습니다.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이무영 생가 전경. 음성군은 2002년과 2003년 군비를 들여 이 부지를 매입했다.
음성군이 설치한 이무영 생가 안내판. 그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내용은 전부 찬양 일색이다.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이무영 생가터

우선 생가입구에는 음성군이 설치한 ‘이무영 선생 생가터’라는 안내판이 등장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작품으로 알려진 ‘청기와집’으로 조선총독부가 주는 ‘조선예술상’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합니다. 어디에도 그것이 친일문학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가면 설성공원에 있던 이무영 작품비가 나옵니다. 설성공원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곳으로 이전 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독립운동가도 갖고 있지 못한 이무영의 흉상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성군향토민속전시관에 가도 이무영의 흔적은 여전합니다. 이무영의 살아 생전 사용하던 유품과 사진이 별도의 공간에 전시돼 있습니다.

어색한 사진도 있습니다. 바로 이무영이 횃불문양의 소품을 들고 3‧1절 기념 가두행진을 벌이는 사진입니다.

‘일급친일’로 분류되는 인사의 3‧1운동 기념 가두행진이라니 변신은 이렇게 파격적이여야 하나 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쥐꼬리 만한 한 줄 이지만 그래도 그의 친일 행적이 언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말(1942~1945)에는 대동아전기, 개천촌보고 등 친일적인 글들을 남겼다”고 돼 있습니다. 아! 다시 보니 한 줄이 아니고 자그마치 줄이네요.

음성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설치된 이무영 안내판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나 던져 봅니다.

언제까지 친일인사들의 유적을 세금을 들여서까지 보전해야 할까요? 충북도의회 이상정 의원은 “2012년에도 그렇고 계속 해서 이무영의 유적을 철거하자고 요청했다”며 “세금을 들여서 까지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거를 못하면 그 자리에 이무영의 친일행적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음성문화원 박경일 사무국장도 “이무영의 유적이 세금까지 들여서 보전될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무영 친일 행적 어땠길래?

 

이무영의 친일행각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에 낱낱이 드러나 있습니다.

진상보고서에는 48쪽, 친일인명사전에는 7쪽에 걸쳐 이무영의 친일활동상과 친일문학의 구체적 내용이 적시돼 있습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은 1920년까지 충주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습니다.

이무영은 1942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습니다.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합니다.

이 작품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인데요.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합니다.

청기와집의 가장 권 대감은 '사대주의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 제일주의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의 신사상'을 대변하는데 권 대감이 세상을 뜨고 수봉도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됐으며, 인철은 젊은 일본인으로서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이 친일 행적을 싣기엔 내용이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2002년 3월 9일 충북인뉴스의 모 신문인 충청리뷰에 실린 <민족을 담보로 부귀를 챙긴 사람들>이란 기사로 대신합니다.

 

<민족을 담보로 부귀를 챙긴 사람들>

 

이무영(1908∼1960·음성 출생)

농민문학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이무영의 친일행적은 민예총 충북지회가 발간한 ‘청주문학 2집’에 실린 임기현씨 글을 통해 드러났다. 이무영은 동아일보 기자, 서울대 강사, 단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무영은 39년이후 ‘귀농문학’으로 불리는 본격적인 농촌소설을 쓰게 된다. 하지만 대표작으로 손꼽는 ‘흙의 노예’ 등 농민소설 속에는 일제의 수탈이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오히려 일본을 ‘우리 국가’로 칭하면서 농촌문제를 단순히 도시화, 물가상승으로 인한 지출의 증대로 몰고갔다.

특히 40년대 들어 이무영은 여러편의 일문소설을 발표해 내용적으로 뚜렷한 숭일문학의 경향을 나타났다. 소설 ‘청기와집’은 조선인이 쓴 최초의 일문 장편소설로 일제로부터 제4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개혁촌을 보고’ ‘선구자들의 변’ ‘촌거단상’ ‘소개산 전훈’ 등도 숭일문학 작품으로 분류된다. 결국 이무영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팔아 일제에 찬양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남균 기자 spartakooks@hanmail.net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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