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 아곡리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8일~16일 유해 발굴150여명 희생추정…수습유해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키로

충북 보도연맹유족회 이세찬 회장

“우리 아버지 좀 꼭 만나게 해 주세요”

1950년 당시 15세였던 이세찬의 간절한 부탁에 캘빈총을 들고 있던 군인이 아버지 이문구 씨를 미원초등학교 한 교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이세찬은 어머니 심부름으로 아버지에게 중의적삼을 건네러 온 것이다.

이세찬의 아버지 이문구 씨.

그는 보도연맹원이기는커녕 오히려 우익의 대표단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청년단의 단장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보도연맹원으로 둔갑해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미원초에 감금됐다.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하고 큰 소리로 불렀지만 이문구 씨는 아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쓰고 있던 맥고모자와 약간의 돈이 들어있던 쌈지만을 건넨다.

그리고 “갖고 어서 올라가거라”라는 말만 되뇌인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 다른 눈빛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이세찬 씨는 69년이 지난 지금도 그 허망한 이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꼬박 69년이 흘렀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노쇠한 84세 이세찬 씨(충북보도연맹유족회 회장).

그는 지난 8일 아버지 이문구 씨를 만나러 새벽부터 보은군 아곡리를 찾았다.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다녀갔던 곳이지만 오늘따라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세찬 씨는 “지금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평생의 한이다. 이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니 기쁘면서도 착잡하고 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울먹였다.

 

지난 8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15번지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6차 유해발굴조사 개토제가 열렸다.

 

지난 8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15번지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6차 유해발굴조사 개토제가 열렸다.

보도연맹원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저승으로 떠난 150여명의 영혼들이 드디어 세상과 마주하는 날이다.

살풀이 춤에 이어 영령들의 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 후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굴삭기가 조심조심 땅을 파내려 간지 30여분. 드디어 유해가 땅속에서 나왔다. 방광뼈인 듯 손바닥만한 크기의 둥그렇고 갈색빛을 띤 뼈조각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얼핏 보아 나뭇가지나 돌덩이로 보이지만 분명 사람의 뼈다.

굴삭기와 호미질로 땅을 판지 1시간 남짓 동안 발견된 뼈 조각만 10여개다. 진흙과 나뭇가지, 비닐 등과 뒤섞여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날, 그 참혹한 시간의 흔적이다.

아곡리는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보도연맹원 150여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뒤 집단 매장당한 곳이다.

‘속리산 구경시켜 줄테니 음식 싸갖고 와라’는 말에 속아 당시 청주경찰서 무덕관으로 갔던 중앙초등학교 박정순 교사도 이곳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순 교사의 남편 최동식 씨는 좌익활동을 하다 경찰의 검거를 피해 도망다니다 행방불명됐다.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차에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이전의 전력을 묻지 않는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리고 ‘빨리 무덕관으로 모이라’는 말을 충실히 따랐을 뿐 박정순 씨도 이문구 씨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곡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아곡리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06년 선정했던 충북도내 우선 발굴 대상지 6곳 중 한 곳이다.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는 2014년 이미 이곳에서 팔·다리뼈와 두개골 등 유해와 유품 20여점을 수습한 바 있다.

 

 

지난 8일 발굴 작업 중 발견된 유해.

 

공동조사단은 지난 2014년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제 1학살지에서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1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9명의 유해와 유품을 발굴했다.

2차는 2015년 2월 대전 동구 낭월동에서, 3차는 2015년 11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에서, 그리고 4차는 2017년 2월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제 2학살지에서 각각 유해를 발굴했다. 이어 5차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일대에서 유해와 유품을 발굴한 바 있다. 1차부터 5차까지 발굴한 유해만 최소 326명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당시 정당한 이유나 절차 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사연을 담은 ‘기억전쟁’을 저술한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한국전쟁기에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은 20만 명에 달할 것이다. 충북에서만도 7400여명이나 된다”고 밝혔다.

공동조사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한 뒤 지하 광산이나 이름 모를 산속에 수십 년 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어 왔다. 그나마 진실화해위원회가 일부 유해와 유품을 수습해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치하였다가 2016년 세종시 추모의 집으로 옮겨 모셨으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국가차원의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법적, 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 인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진상규명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발굴은 충북 지방보조금 지원사업으로 지정, 앞으로 공동조사단은 아곡리 외에도 청주 옛 삼선동 삼거리(현 상당구 가덕면 인차삼거리 부근), 청주 서원구 남이면 분터골·지경골, 단양 영춘면 곡계굴, 영동군 상춘면 고자리,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에서 본격적으로 유해발굴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충북도는 이번 발굴 사업을 통해 수습되는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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