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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는 죄가 없겠지만…수탈의 잔재, 청주군시제사 공장

기사승인 2019.03.23  18:5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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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뽕나무 강제배포하고 노동력착위해 비단 생산
일제, 청주에 제사공장 설립…어린여공 12시간 노동
여성노동자, 파업으로 맞서며 차별대우에 저항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누에고추를 사들여 명주실을 생산해 일본에 수출, 청주경제에 이바지했던 남한제사공장 모습. 이 공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1929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군시제사주식회사 청주공장으로 지어졌다..

 

1919년 4월 3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사무소 앞에서 양봉식이 외칩니다.

“군민이 좁쌀을 살 돈도 없어 고생하는데 비싼 상묘를 사라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상묘를 심을 뽕밭도 없지 않느냐? 상묘를 없애 버리자.”(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양봉식 판결문)

여기서 ‘상묘’(桑苗)는 뽕나무 묘묙입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양봉식의 선동에 따라 면사무소 인근에 식재된 2만 8000여 그루의 뽕나무 묘복을 죄다 뽑은 뒤 면사무소에 흩어 놓습니다.

그러자 다시 양봉식이 외칩니다. “이렇게 흩어 놓았자 내일 다시 줏어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배포할 것인즉 모두 불태워 버리자.”

군중은 다시 함성를 올리고 노상으로 뽕나무 묘목을 모아 놓고 불을 지릅니다.

 

양봉식은 왜 “왜 좁쌀을 살 돈도 없다”고 외쳤을까요?

 

1960년대 남사제사 주식회사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의 모습

일제는 자국내에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미곡생산기지로 만들려합니다. 이를 위해 1918년 산미증산계획을 세우고 이를 쌀 생산량을 높이려 합니다. 악랄한 식량수탈 정책은 수치로 나타납니다.

1912년 일제가 가져간 미곡생산량은 50만석으로 전체생산량 1660만석의 4.3%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1933년에는 일제가 가져간 미곡이 전체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52%였습니다.

반면 일제는 조선인에 의한 쌀 소비는 적극적으로 억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양질의 쌀은 일본으로 보내는 대신, 일제는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해 먹게 했습니다.

일제는 1912년 만주에서 생산된 조(좁쌀)를 1만5000석 수입했고 1930년에는 172만석을 수입했습니다. 우리 농민은 쌀 농사를 지어도 쌀밥은 구경도 못하고 조밥 등 잡곡만 먹고 살 실정이 된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제가 눈독을 들인 것이 바로 뽕나무입니다. 비단 실을 만드는 누에고치는 뽕나무 잎을 먹고 자랍니다. 비단을 유럽이나 미국에 수출하려면 뽕나무가 있어야 하고 누에고치를 기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1910년 강제병합 이전부터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진행하고 누에고치를 치는 양잠사업을 이식시킵니다.

특히 양잠사업은 부녀자나 노인, 어린이들의 노동력까지 생산에 총 동원할수 있고 저가의 노동력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 낼수 있다고 봤습니다.

일제는 이런 판단을 통해 1910년부터 잠업전습소(蠶業 傳習所)를 설치했습니다. ‘노상계’란 개량종 뽕나무를 농가에 배부해 심도록 했는데 이때 강제배포 등의 방식이 동원됐습니다.

심지어 밭이 없어 심을 곳이 없다면 자가상전제도(自家桑田制度)가 설정돼 밭을 사서 뽕나무를 심으면 5년 동안 나눠 상환케 했습니다.

일제는 뽕나무를 먹여 길러낸 누에고치를 잠사조합으로 하여금 군농회의 공판장을 통해 수매했습니다. 이때 수매가격은 일방적이고 농가가 집에서 누에고치의 실을 뽑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이렇게 수탈한 누에고치는 터무니없이 값싼 조선의 노동력에 의해 제사(실을 뽑는 것) 작업을 수행하게 합니다.

일제의 가혹한 착취수법으로 생산된 생사(生絲 : 비단으로 가공되기 이전의 실)는 세계 1차 대전 직후 유례없이 좋았던 국제경기를 타그 미국과 영국 등 유럽으로 수출됩니다.

이를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 일제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함등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고 하네요.

 

색마지사 박중양 “충북도를 뽕나무의 나라로 만들자”

 

1925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캡처)

‘이또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렸던 친일파 박중양(일제강점기 충북도지사). 조선총독을 법주사에 데려가 여승을 술시중을 들게하고 심지어 겁탈해 자살하게 만든 악덕 친일파입니다.

그는 충북도지사으로 있던 1925년 충북 전 지역을 대상으로 농가 각 호에 뽕나무 50그루씩 강제로 배정합니다. 강제로 배정한 것도 모자라 대금 1원씩도 거둬 둘입니다. 이에 대해 1925년 3월 23일 동아일보는 박중양의 (뽕나무) 식수 정책으로 가뜩이나 쓰라린 생활을 하는 농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박중양이 충북을 ‘뽕나무의 나라’로 만들려 한다고 묘사합니다.

 

1925년 3월 23일 매일신보 기사

1925년 1월 23일 매일신보에는 “장차 뽕나무 나라로 화할 충북은 이같은 희비극이 도처에 열린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합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뽕나무의 나라를 만들려는 충청북도의 군수회의는 지난 (1월) 십칠일로써 마치고 그날 오후부터는 청주읍내에서 십여리되는 사주면 내덕리라 하는 곳에 가서 한집에 50 본씩의 뽕 남무 심으는 방법을 실제로 지도하게 되었다.”

박중양이 당시 충북도내 군수 열명에게 직접 농가에 가 뽕나무 50그루를 심게 한 겁니다.

매일신보는 군수에 대해 ‘군수 영감’이라고 호칭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열명의 군수와 수행원 등 30여명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발목에 각반을 질끈 동여매고 작업에 투입됩니다.

매일신보는 이 장면에 대해 “30여명의 양복을 입은 영감 농부들은 각반을 질근 동이고 뽕나무를 들러매고 내덕리 촌락을 향하야 가는바 그 동리는 별안간 검은 옷을 입은 농부들로써 전부 에워싼 바이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해당 군수들은 각 농가에 심을 수 있는 곳이 부족하면서 먼곳에 위치한 논이나 밭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할당된 뽕나무 50그루를 다 심어야 했으니까요.

매일신보는 “만일 논이나 밭에 심게 되는 경우는 산을 넘고 내를 건너서 가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면서 “영감 농부들은 기수들을 데리고 땀을 흘려가며 이리저리로 갈팡질팡하는 꼴은 장관이었다. 그뿐이면 일도 없지만 오후 한시로부터 네시 반까지 삼세시간을 두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기운이 지치고 배가 고파서 헐떡거리는 거동은 참으로 불쌍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영감은 목 쉬고 허기가 져서 뽕나무 심기 전에 사람 죽겠다”고 투덜거렸다고 보도합니다.

군수들이 이 정도 였으니 일반 민중들의 고통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하루 12시간 노동에 동원된 13~18세 여성노동자

 

청주시 사직동 옛 시외버스터미널 부지는 원래 ‘남한제사’라는 회사 공장이었습니다. 제사(製絲)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공장은 원래 일제강점기때 일본인이 소유한 ‘군시(郡是)주식회사’ 청주제사공장이 있던 자리입니다.

1928년에 짓기로 하고 1929년에 공장이 만들어졌습니다.

1931년 이 공장에는 나이어린 여성노동자 290명과 남성노동자 30명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1931년 9월 8일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갑니다. 1931년 9월 10일자 ‘청주군시제사 파업, 여공 등 전부 파업’이란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이들 여성노동자는 매일 11시간 40분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임금은 최고 70전 최하 15전으로 평균 25전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고 하루 뒤인 1931년 10월 9일 차후에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파업을 중단합니다.

1년뒤인 1932년 12월 20일 군시제사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다시 파업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지난해 약속했던 임금인상을 해줄 것과 일본인 관리자 2명을 내보낼 것, 운동장 설치와 기숙사 환경개선등을 요구합니다.

일본기업 군시제사 측은 여성노동자이 파업에 돌입하자 경찰을 불러들려 외부와 연락할수 없도록 차단합니다. 경찰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배후가 있다며 염탐을 시작합니다.

1932년 12월 22일 밤 군시공장측은 휴업을 선언합니다. 이에 맞서 여성노동자들은 일제 경찰과 공장 관리자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매일신보의 1932년 12월 26일자 <청주군시 여공파업, 사태는 점익 악화 / 식당기명을 깨트리며 항쟁하야 쌍방태도 매우 강경>이란 제목의 기사에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기록돼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여성노동들은 식당내에 있는 그릇 같은 것을 제지하는 경관과 회사측 직원을 향해 던져 유리창 10여매가 부서지고 노동자 9명이 경상을 입었습니다.

공장측과 회사는 다음날 여성노동자들은 각자 집으로 가게 합니다. 1932년 12월 27일 매일신보는 이에대해 “공장 정문전에서 시작해 청주역에 이르기까지 (여성노동자의 대열이) 전체 청주시가에 늘어섰으며 시가의 요처에서는 역시 경관이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고 보도합니다.

이어 “오전 열시부터 공장을 나서기 시작한 여공 일동이 공장 공장으로부터 모습을 감춘 것은 오후 세시나 거의 다 되어서였다. 경관의 경계가 여간 엄중하였는지는 그것만으로도 능히 알만한 바이다”고 밝힙니다.

군사제사주식회사 청주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소실을 전한1932년 12월 26일자 매일신보 기사

 

노동자 파업에 배후를 찾아나선 일제 경찰

 

군시공장 측은 파업초기부터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탄압합니다. 파업 2일만에 공장의 휴업을 단행하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전원을 해고합니다.

경찰은 파업 처음부터 배후관계를 조사한다며 집에 돌아가 있는 여공을 소환해 조사합니다. 청주경찰서 외에 다른 경찰서구내에 있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 지방경찰에 의뢰해 세밀한 조사를 진행합니다.

동아일보 1933년 01월 05일 기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청주경찰서는 청주 군시 제사공장에 다니는 괴산 여직공 전복희, 이을순, 강석분 3인을 파업사건에 선동혐의가 있다고 괴산 자택에서 이들을 체포해 소환 조사를 합니다.

이때 경찰과 군시회사는 서로 밀탁해 노동자들 불러 조사하고 요구사항을 주장하지 말고 복직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은 2개월의 투쟁 끝에 승리합니다.

이에대해 동아일보는 1933년 3월 3일 <공장측 과오를 자성, 동맹파업여공 전부복직 / 청주군시제사 파업 완전해결, 희한한 직공측 승리>기사를 통해 노동자들의 승리 사실을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군시제사 청주공장장은 “공장의 근본방침이 틀렸다”며 여성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파업에 참가했다 해고된 400명의 여성노동자들은 1922년 2월 27일자로 전원 복직합니다.

일제강점기 청주의 유일한 공장으로 전해진 군시제사공장. 뽕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마는 뽕나무와 누에고치를 통해 농민과 여성노동자들을 수탈한 일제의 가혹한 수탈의 역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김남균 기자 spartakooks@hanmail.net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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