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 “예총·문화원, 무영제 거부…예산편성 안해”
터미널 인근 무영로·이무영 문학비 철거 문제 남아

▲ 소설가 이무영
친일문인 이무영을 기리며 올해로 18회째 열린 무영제가 드디어 폐지될 전망이다. 지난 10일 이필용 음성군수는 “이무영 선생 기념사업을 주관하는 예총과 문화원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더 이상 기념사업을 못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며 “이에 따라 사업 보조금을 지원할 단체가 없어 내년부터 기념사업 예산을 편성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음성군의 이 같은 결정에 그동안 무영제 폐지에 앞장선 ‘친일파 이무영 기념사업 폐지를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는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대책위는 “무영제 뿐 아니라 설성공원에 세워진 이무영 문학비 철거와 무영로 도로명칭 변경, 역사자료관에 있는 자료 삭제 등 일급 친일행각을 해온 이무영과 관련된 것들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파에 혈세 지원 논란 종식

음성군은 지금껏 지역 출신 문인인 이무영을 농민문학의 선구자로 기리며 연간 2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무영제를 열어왔다. 지난 4월 27일에도 18회 무영제가 열렸지만 음성민중연대와 감리교농촌선교훈련원 등 10여개 단체로 구성된 대책위는 “음성군의 수치”라며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음성군이 지난달 29일 예총과 지역 문인을 대상으로 예산 지원과 기념사업 지속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결과는 유족과 개인의 차원에서 이무영을 추모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역 문화단체 차원의 행사 개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음성군이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예산 지원을 중단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이무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5쪽이나 장식할 정도로 수많은 친일행각을 펼쳐왔다. 하지만 음성에서는 음성출신의 소설가로 흙의 작가, 농민문학의 대부로 추앙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사비 전액을 부담해 온 음성군은 무영제 폐지를 요구하는 단체들로부터 공공기관이 친일을 용인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아왔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본명 이갑룡)은 1920년까지 음성·충주 등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았다.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전전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약한다. 1939년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 18년째 친일문인을 기리며 열렸던 무영제가 더이상 열리지 않게 됐다. 음성군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더이상 사업비를 지원하지 않기로 한 것. 사진은 지난 4월20일 음성읍 설성공원에서 열린 18회 무영제.

일본어로 소설 쓴 최초의 조선인

이무영의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42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청기와집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한다.

청기와집의 가장 권 대감은 ‘지나(支那·중국의 음차)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 제일주의에 빠진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결론은 권 대감이 세상을 뜨고 수봉도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됐으며, 인철은 젊은 일본인으로서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무영은 같은 시기 문인협회가 파견한 만주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간도의 조선인 개척촌을 돌아보고 온 뒤 좌담회와 집필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분촌(分村)이 조선에서도 시행됐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에 대해 “일제가 조선에서 행한 정책적 농업식민을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한 아류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해군대령(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예편한 뒤 1960년 작고할 때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